감사공(휘 욱)하음공(휘 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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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420회 작성일 11-04-23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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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역전경5.JPG 감사공묘1.JPG 감사공묘2.JPG 감사공비1.JPG 감사공비2.JPG

 

통정대부 수 강원도관찰사겸병마수군절도사 강공 묘지명

 

       공의 휘는 욱(昱)이고 자는 광중(光仲)이니 진주강씨이 다。 五代조의 휘는 원우(元佑)니 공주목사이고

       고조의 휘는 중선(仲善)이니 곡산군수이고 증조의 휘는 순민(舜民)이니 성균관 생원(生員 : 진사와 같음)

       으로서 증 호조참의이고 조고의 휘는 경서(景敍)니 승정원 좌부승지로서 증 예조참판이고 아버지의 휘는

       공망(公望)이니 종사랑으로서 증 형조판서이다。 어머니는 경주최씨(慶州崔氏)니 봉사(奉事) 장손(長孫)

       의 女이다。공이 어릴때부터 학문을 독실히해서 가정갑오(嘉靖甲午。중종二十九년)에 진사 시험에 합격

       했고 경자(庚子 :중종 三十五년 서기一五四〇�)에 대과(大科)에 올라서 처음 승문원 권지(承文院權知)로

       들어가서 예문관검열(檢閱)을 거쳐 봉교(奉敎)에 이르러 형조 공조 호조 좌랑(佐郞)이 되었으며 사간원

       정언(正言)을 두번지냈고 사직(史職 :춘추관)을 여러번 지내면서 중종과 인종에 실록을 편찬했다。

       호조、예조정랑 과、성균관 직강、사간원 헌랍、사헌부지평、종부시첨정 등을 옮겨 다 니다가 남원부사

       (南原府使)로 나갔는데 그때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주리고 있는데 공이 열심히 구휼을 하니 떠나간 백성

       들이 다시 모여들어 온전히 살게된 자가 천여이나 되니 어사가 장계를 올려 임금에게 알리니 임금께서 크

       게 아름답게 여겨 특별히 통정 대부(通政大夫 :정三품)에 승진시키고 임기 만료됨에 승정원 동부승지(同

       副承旨)를 시켰 는데 비방을 당해 파직되었다가 조금뒤에 공조참의가 되었으며 다시 승정원에 들어가서

       좌부승지(左副承旨)에 승진했다가 형조참의로 벼슬이 갈리었다。 다시 우부승지가 되어 서 도승지에 

       이르렀는데 권귀(權貴 :간신)에게 거슬리어 병을 핑계하고 면직했다。

       다시 장례원 판결사를 제수받았으며 예조참의를 거쳐 강원도 안찰사로 나갔다가 다시 예조참의를 하다

       가 승정원 도승지를 두 번 하다가 형조참의에 벼슬을 바뀌었는데 외직 으로 나가기를 청해서 수원부사

       로 갔는데 다스리기를 가장 잘해서 내직으로 판결사(判 決事)에 배했다가 성천부사(成川府使 :평안남

       도)의 외직으로 나갔으며 감사(監司) 어사(御史) 등을 교대로 계속하니 상감께서 교서로 포창을 하고 옷

       안밖 한 벌과 말 한필을 하사하고 첨지중추부사 이었는데 판결사로 바꾸었으며 또 파주목사로 나갔다가

       병을 만 나 가마에 실려와서 졸했으니 이때가 만력갑술(萬曆甲戌 :선조 七년 一五七四)二월 무오 일이었

       다。 향년이 六十四세이다。四월 병오일을 택해서 교하고을 남쪽 석관리 묘좌유 향 언덕에 장사지냈으

       니 선영이 있는 곳이다。공은 사람됨이 도탑고 질박하여 침묵하고 굳세며 법에 맞게하니 일처리 하기를

       모두 법도가 있었다。 풍채가 엄격해서 비록 친한 사람이라도 감히 함부로하지 아니하고 사람들과 사귈

       때는 차별함이 없었다。모부인이 일찍 세상을 떠남에 판서공(判書公 : 아버지)이 낙향을해서 고향에 와

       계시고 모든 동생이나 자매들이 어려서 서울에 살고 있는데 의복등 절이 넉넉지 못한데 공이 마음을 다

       해 가르치고 기르며 또 결혼을 시켜 서 각각 자립해서 살도록했고 외조부 봉사공(奉事公)이 돌아가시고

       아들이 없어서 공에게 의탁하고 살았는데 외조부를 봉사하던 토지와 노비가 모두 공에게 돌아갔는데 공

       이 말하기를 나의 동생과 자매들이 모두 재산이 없는데 나혼자서 다 가질수 없다하고 다 나누어 주었다.

       처음 벼슬한 후로 간알(干謁 :청탁)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당시에 정승판서들 집에공의 이름이 올라

       있는 것을 보지 못했으니 대개 공의 재주와 기량이 여기에 그친 것이 아니니 만년에 벼슬이 이래서 계속

       된 것이 아닌가 공이 벼슬할 때 삼가고 조심하고 또 사사로운 일을 하지 아니해 가는 곳마다 항상 잘 다

       스렸고 가정생활을 간략하게해서 돌아가셨을 때 장사지낼 비용이 없었다。부인 李氏는 명상(名相 :훌륭

       한 정승)인 광릉부원군 극배(廣陵府院君克培)의 현손이고 충의위 이곤(忠義衛以坤)의 女이다。집다스

       리는데 법도가 있고 제사 받드는데 예절을 어김이 없었다。융경무진(隆慶戊辰 :선조 원년 一五六八)에

       졸하니 향년이 五十三세이다。공의 묘소 왼쪽에 장사지냈다。一男二女를 낳았으니 아들 대호(大虎)는

       성균생원(成均生員)이고 장녀는 사헌부 지평인 조정기(趙廷機)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유학 정억령(幼學

       鄭億齡)에게 시집갔다。생원인 대호가 三男二女를 두었고 지평인 맏사위가 三男四女를 두었으니 맏아

       들은 수륜(守倫)이다。유학(幼學 : 선비)인 둘째사위는 一男三女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공의 동생

       섬(暹)이 공으로 더불어 벼슬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데 지금 한성판윤(漢城判尹)이다。 장차 그 형님

       감사공을 장사지내는데 나 송인(宋寅)에게 부탁하기를 자네가 우리집과 세교(世交)가 있는데 형님을 장

       사지내는데 자네가 묘지문을 지어 주는것이 좋겠네 하거늘 내가 누차 지을만한 사람이 못된다고 사양했

       으나 허락을 받지 못해서 가승에 의거해 명을 짓기를 교하남쪽 석관리에 오직 강공을 여기에 장사 지낸

       다.  그 자취를 추려 뇌문을 짓노라

       백세후에도 훼손됨이 없을 것이 다。

   

       황명 만력二년 갑술(一五七四)八월일에 봉헌대부 여성군 송인은 기록하노라。

 

숙부인 광주이씨 묘지문

 

      부인의 성은 李氏이고 관향은 광주(廣州)인데 둔촌 집(遁村集)의 후손이다。고조의 휘는 극배(克培)니

      좌리공신(佐理功臣)으로 벼슬은 영의정 광릉부원군이고 증조의 휘는 세필(世弼)이니 문과(文科)에 합

      격해서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 다。조고의 휘는 수함(守諴�)이니 음직(蔭職)으로 귀후서 별좌(歸厚

      署別坐)이고 아버지의 휘는 이곤(以坤)이니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세상을 일찍 떠났다。부인이 정덕병

      자(正德(명나라 연호)丙子 :중종十一년 一五一六)十一월 初六일에 모비(母妣:어머니의 어머니)인 박씨

      집에서 태어났으니 朴氏는 훌륭한 밀양박씨인데 생원(生員)수손(秀孫)의 女이다。이미 장성함에 지금

      통정대부 행 성천부사인 강욱(姜昱)에게 시집왔다。 부사 강공이 문과에 합격해서 벼슬길에 올라 승지

      참의 감사등을 거쳐 누차 큰 고을 맡았으므로 이로서 숙부인(淑夫人)에 봉했다。부인은 천성이 곧고 정

      직하고 기품이 통달하고 민첩했으며 제사 받드는데 정성스럽게하고 가정을 다스리는데 법도가 있었으  

      며 강씨 가문으로 시집온 것이 무릇 三十六년이었다。융경무진(隆慶戊辰 :선조 원년一五六八)十월 初

      七일에 병으로서 성천관아에서  졸했으니 향년이 五十三세이다。一男二女를 두었으니 아들 대호(大虎)

      는 갑자년에 사마( 司馬) 시험에 합격해서 주부 이은(李殷)의 女에게 장가들어 二男二女를 두었으나 모

      두어리다。장녀는 지금 홍문관 수찬인 조정기(趙廷機)에게 시집가서 三男三女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고

      둘째는 유학 정억령(鄭億齡)에게 시집가서 一男三女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돌아가던해 十二월 初

       四일에 교하 선영국내 묘좌유향 언덕에 장사지냈다。

   

      통정대부 승정원 우부승지 겸 경연 참찬관 춘추관 수찬관 유희춘은 기록 함。

 

하음공.JPG 하음공묘2.JPG 하음공비.JPG 하음공비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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